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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라졌다.
 
 

 
10일 전 이사했다. 시멘트 옥상에 붙은 옥탑방인데 고시원보다 월 고정비가 4만원 더 저렴하다.
 
원래 지내던 곳은 여느 고시원들이 그렇듯 미어터지게 좁았지만 관리 상태가 청결해서 지낼만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난 사시사철 창문을 열어두고 지내야 하는 사람이고. 거긴 창문이 없었다. 문만 열면 탁 트인 하늘에서 바람이 들어오니 확실히 상쾌하다.
 
 
 

 
지구본과 늘어난 꽃들
 
 

 
 
한 이틀 정도 왼쪽 같은 상태에서 아무렇게나 자다가, 아무래도, 추워서.
이불이 없으면 춥구나.
당연한가.
헌 이불과 전축과 심심할 때 읽을 책들과 옷가지 조금을 가져왔다.
 
짐이 애초에 많지 않다. 받은 것들을 빼면 물건은 자주 버린다. 대충으로도 만족하니 생활에 뭐가 많이 필요한 타입이 아니고. 에너지 총량에 맞추어 곁가지들을 쳐내두어야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걸 경험으로 배웠다. 뭐에든 꾸준히 신경 쓴다는 일 자체가 좀 어렵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말아야 하는 거잖아 근데 사람은 약해지고 물건은 더러워지고 아무튼 점점 더 흐트러져간다는 게
 
손에 든 것들을 다 알아볼 수 있어야 하고, 그것들 전부 반짝반짝 광나게 닦인 채여야 하고, 그래서 언제건 맨손으로 만질 수 있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으니까 번다한 살림살이에 대한 거부가 심한 것이다.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는 옥조를 따르자면 곤도 마리에 씨 저 전부 버려야 해요 (그럴수록 좋네, 이거 좋다고 느낄 때마다 그 느낌을 꽉 붙들지 않으면 안 된다 구분에 재능이 없는 사람일수록 특히나. 실은 무거운 뭔가를 함부로 다뤘던 거라면 실수니까.)
 
단순히 내 게으름이 심한 것뿐일지도 모르겠지만.
 
 

 
 
3월 14일 K가 왔다. 카레를 해주기로 했다.
 
두툼하고 질 좋은 외투를 입고 나갔다. 할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옷인데 따뜻하고 커다란 양품이다. K는 용산역에서 만나자마자 옷이 구리다, 멀리서 보자마자 왜 구린 옷을 입고 있지. 생각했다고 한다. 유품이라는 말에도 잠시 고민하더니 역시 구리다고 되풀이했다. (하지만 잘 마감된 안감과 안주머니를 보고 꽤 좋은 옷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고쳐주었다.)
 
역 영화관에서 왕과 사는 남자 봄. 재밌었어. 유해진은 역시 코믹한 연기를 참 잘한다. 반전 없이 플랫한 전개에 연출도 직설적이었지만, 나는 동행인을 끼고 볼 땐 머리가 바로바로 반응할 수 있는 쉬운 문법의 영화가 좋다. 외지인이 공동체에 섞여드는 이야기는 언제나 일정 수준의 감동을 보장하기도 하고.
 
그럼 이제 돌아가야 하는데. 지금보다도 집에 갖추어진 게 별로 없던 때라 좀 미안했다. 다행히 당일에 매트리스가 왔다. K는 나 줄 도시락을 싸 왔다. 옥상에서 마주친 집주인분께서 친구가 온다 하니 창고 접이식 식탁을 빌려주셨다. 그 식탁은 삼박 내내 가장 유용하게 쓰였다.
 
 

 
 
본인은 편의점 도시락인데 내 거엔 문어 소시지. 계란말이. 꽃모양 당근과 방울토마토. 브로콜리.
: ) 하고 웃고 있는 완두콩.
K의 도시락은, 매체에서 보던, 도시락 같이 생긴 도시락. 도시락이라는 개념 안에 알맞게 들어갈 것 같은 구성과 요소들. 귀엽다.
맛있었고, 특히 소시지랑 김 계란말이 엄청 맛있었고, 베푸는 입장이면서 기뻐해 주는 것도 좋았고, 같이 마신 유자 맥주랑 레몬 맥주도 맛있었다.
 
그렇게 늦게 잠든 것도 아닌데 피곤했는지 다음날 네시까지 잤다.
 
 
 

 
요리는 잘 못한다.

약지를 베였다. 흐르는 물에 씻고 계속 만드는 동안 피가 멎지 않았다. 그 채로 이것저것 만져대니 곳곳에 피가 묻어버렸다. 부끄럽지만 저기 생수에도 묻어있고 밑 사진에 나오는 컵에도 묻어있다. 살인 현장 같다는 말이 나왔다. 뒤처리는 거의 K가 해준 것 같다.
 
요리를 시작하면 각종 양념의 위생과 유통기한 등 관리할 게 많아진다. 대부분의 재료는 그대로도 섭취할 수 있으니 그대로 먹는다. 배는 또 고파지는데 잠깐의 만족에 시간과 수고를 희생하는 게 아깝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런데 남을 위해 해줄 땐, 다시 배가 고파지니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요리라는 시스템의 단점을 빼고 장점만 취한 시스템. 식사 자체보다 정성을 선물하는 것 같아. 나름 추억이 된다.
 
K가 오지 않았더라면 언제까지나 마요밥으로나 연명했을 텐데. 도구 같은 것도 없었겠지. 카레 하나 만든다고 해도 당근 감자 식용유 맛술 감자가 있으니 감자깎이 양파 마늘 도마 식칼 그릇 또 밥은 지은 것으로 먹이고 싶으니까 일인용 밥솥이랑 쌀 등등 살 게 많아서, 주방을 채우는 계기가 되었다.
 
 

 
집이 집다워져가고 있다.
기분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K가 내가 카레를 만드는 동안, 감사하게도 집주인께서 제공해 준, 그러나 말도 안 되게 더러운 전기포트와 전자레인지를 닦아줬고. 정수기도 놔줬고. 사람이 오니 나도 자꾸 뭘 들이게 되고 정돈이라는 걸 하게 되어서 (사진은 어질러져 있지만.) 진화했다 집이.
K는 요리하는 동안은 타는 냄새가 난다고 잔소리하더니 내오고 나선 별치즈 예쁘다며 맛있게 먹어줬다.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 갑자기.
 
네가 만든 카레 머리가 아프게 짰어.
 
라는 게 아닌가.
 
그런 일도 있는 것이다.
 
 
 
 
세탁방 냄새가 좋다. 갓 나온 빨랫감에 얼굴을 박는 게 좋다. 어렸을 땐 세제 냄새라는 걸 몰라서 물에서는 이렇게 깨끗한 냄새가 나는구나 생각했었지. 그리고 노래방도 갔던 것 같은데. K의 선곡 센스가 대단했다. 이걸 부르다니... 라는 기분이 돼서 감동받았어. 노래는 수련을 한 건 맞나 싶게 못 불렀지만.

간 노래방은 마지막으로 찾은 코인 노래방이었다. 처음엔 대형 룸에 가고 싶어서 일곱 군데 정도를 찍었는데 간판만 흔해빠져 널렸지 전부 폐점이거나 들어가는 입구를 찾을 수 없었다. 대부분 어두운 지하에 위치해 있어서 리미널 스페이스를 계속 헤매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솔직히 컨텐츠 아닌가. 더 구경하고 싶었는데 겁먹은 K가 나를 바깥으로 이끌었다.
 

 
무섭긴 하다. 노래방들 뒤지는 길에 철물점 문틈으로 늘어진 고양이를 봤다.
 
 


꽃.
 
아네모네랑 주황 튤립. 아네모네 색이 엄청 예뻐. 머리가 커서 빨리 죽은 게 아쉽다. 말릴 걸 그랬나 싶다가도 잘 모르는 방법을 어설프게 따르다 망칠 바엔 언제나 시간에 시들게 두는 게 낫다는 생각에 미친다. 화요일, 돌아가는 역에서 K는 병푸딩을 사줬는데 내용물이 전형적인 커스타드 푸딩 색이라 귀여웠다. 아담하고 예쁜 용기다. 지금은 다 먹고 잘 씻어 좋아하는 구슬들을 담아놨다.
 
푸딩 같이 생긴 푸딩, 케이크 같이 생긴 케이크, 침대처럼 생긴 침대나 책가방 같이 생긴 책가방 같은 것들 귀엽지 않나.
이데아에 부합하는 사물들.
 
 


K는 이것을 남기고 떠났다.
 
 

 
 
토요일에는 다른 친구들이 왔다. 노릇이가 일본에서 산 우유 푸딩을 주러 왔고. 또 예원이는 곧 일본에 가니까, 가기 전에 샀던 키링을 주려고 왔는데. (너무 받기만 해서 민망하네요. 나는 예원이한테 줘야 할 걸 못 줬는데...) 소식을 들은 연우 씨와 채영이가 합류하고 마침 시간이 비었던 은혜까지 모여서, 어쩌다 보니 부산에 사는 한 명만 빠진 단체 집들이가 되어버렸다. 머니까 어쩔 수 없지만 은진이가 없어서 아쉬워.
 
 


 
진짜 맛있게 논 사람들 같군
예원이가 가져온 저 초코 푸딩들이 말도 안 되게 맛있었다. 내장류를 처음 먹어봤다. 야채곱창?
괜찮다고 했지만 솔직히 잘 적응이 안 됐다. 특유의 냄새가 강해서. 그런데 양념이 진해서인지 이상하게 또 생각난다. 다시 먹게 되면 더 즐길 수 있을듯. 이전까지 연이 없었던 음식도 한 번 깨치면 왠지 자석처럼 붙는다. 푸딩도 어른 될 때까지 먹어본 적 없는데 이 글에만 다섯 종류의 푸딩이 나오지...
 
 

 
애들이 찍어준 우리 집
 
 

 
 
아직 시들지 않은 안개꽃을 화병이 없어 소주병에 꽂아 놨는데 반응이 뜨거웠다. 아이돌마냥 셔터가 터짐. 소주병은 입구가 좁아 식줄기를 모으기 적합하다. #추천
참고로 노출녀는 제가 아니라 노릇이입니다
아무튼, 대화 주제는. 격이 낮고 품위가 없었다. 재밌었다.
 
왼쪽은 은혜가 준 수국 !! 수국을 키워보고 싶었다. 화분에 심어져 있긴 한데 아마 절화겠지? 물 주면 오래 살 수 있으려나. 오래 키우고 싶어 꽃잎 안쪽이 예쁜 노란색. 그렇게 애들 보내고 자고 가기로 한 은혜한텐 피방 아이디 빌려주고. 뒷정리하던 주방에서 갑자기 바퀴벌레가 나왔다 외면하고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은 게 지금.
 
아마 배관을 타고 왔겠지. 채영이가 바신병이 정말 심한데 일찍 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10초정도 정신병에 걸렸지만 애초에 옥탑인 이상 어느정도 공존을 각오하고 온 거라서. 멋대로 남의 집에 들어오시다니 참 양식 없는 생물이긴 해도 밀폐된 방 안쪽에만 들어오지 않으면 (부엌은 틈이 많아 도저히 막을 수 없어 보인다) 적당히 살아볼 생각이다. 아니 역시 약을 쳐야 하나...
 
방금 문득 소금이에게 먹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검색해 봤다. 된다고 한다. 약 안 먹이고 붙잡은 바퀴는 좋은 양분이라네. 애초에 풀어두면 자연스럽게 잡아먹을 거래 근데 내가 소금이를 쥐잡이 고양이처럼 쓸 순 없잖아. 아무튼 거저리처럼 생겼고 거저리랑 크게 다를 바도 없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편안해졌다.
 
고민이 끝나니 졸려졌다 그만 쓸래
 

 
밤에 우유푸딩 나눠 먹고 은혜를 보내줬다. 밤늦게까지 수다를 떨다가 잠들었다 아침으로는 라면을 먹였다. (미안.ㅎ)
그나저나 예원이 이제 못 보네. 가지 마 ...
 
 

 
앞에 있는 개천에 사는 새. 요즘 자주 만난다. 오늘 일기는 기록용이고 무슨 말을 쓰려다가 까먹었으니까 이대로 발행.
이번 사진들은 거의 전부가 남의 카메라 폰에서 받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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